죽첨정 ‘단두 유아(斷頭 乳兒)’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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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자 조회 3,387회 작성일 2018-12-29 08:29:34본문
죽첨정 ‘단두 유아(斷頭 乳兒)’ 사건
거리에 나뒹군 뇌수 빼낸 아이 머리, 그 23일간의 대소동
1933년 5월16일 오전 7시30분, 경성 서대문경찰서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여기는 죽첨정(지금의 서대문구 충정로) 3정목 금화장 부근인데 식산은행 쓰레기 매립지에 몸통 없는 아이 머리가 발견되었으니 급히 와보시오.”
식민 지배 23년째. 총독부는 조선의 치안상태가 세계적이라고 자부했다. 경성은 만주처럼 마적떼가 들끓지도 않았고, 상하이처럼 백주에 갱단이 총격전을 벌이지도 않았다. 총독부는 경성이 이렇듯 ‘안전한 도시’가 된 것은 일본의 ‘우수한’ 경찰조직 덕분이라고 자랑해왔다. 그런데 그처럼 ‘안전한 도시’ 한복판에서 백주에 어린아이를 목 잘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단두 유아 사건을 보도한 ‘신동아’ 1933년 7월호 기사와 수사본부가 설치됐던 1930년대 당시의 서대문경찰서.
이처럼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흉악범죄의 발생은 민심을 흉흉하게 할 뿐 아니라 자칫 조선의 치안유지를 주요한 명분으로 삼았던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위협할 수 있었다. 총독부는 범죄를 예방하지 못한 이상, 한시 바삐 범인이라도 검거해 실추된 위신을 회복해야 했다.
제보가 접수되자 경성시내 전 경찰서에 비상이 걸렸다. 선발대 30여 명이 허둥지둥 오토바이, 자동차를 몰아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현장에는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이미 구경꾼 수십명이 운집해 있었다. 경찰은 즉각 비상경계선을 긋고 금화장 앞길과 마포 가는 전차선로에 기마경관을 배치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이어 기무라(木村) 서장 이하 서대문경찰서 간부 전원이 현장에 나타났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요다(依田) 검사의 지휘하에 현장조사가 시작됐다. 경기도 경찰부 노무라(野村) 형사과장은 사진반을 데리고 와서 사건현장 곳곳을 누비며 수십장의 증거사진을 찍었다.
시내 각 신문사와 통신사는 기자를 급파하고 서둘러 호외를 발간했다.
사건현장은 참혹했다. 잘린 머리의 뒤통수는 두치 반이나 깨어져 뇌수가 흘러내렸고, 매립지 곳곳에 핏자국과 뇌수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깨어진 두개골 안쪽으로는 날카로운 칼로 뇌수를 파낸 흔적이 역력했다. 치마폭, 종이, 낡은 수건 세 겹으로 감싼 머리는 쓰레기 매립장 귀퉁이에 깊지 않게 묻혀 있었다.
머리를 옮기는 도중에 흘린 것으로 추측되는 피가 전찻길 건너 마포 방향으로 이어졌다. 경찰견 여러 마리를 풀어 도주한 범인을 추적했지만, 핏자국이 끊긴 프랑스 대사관 부근에서 맴돌 뿐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 못했다. 정오쯤 현장조사가 끝났고, 아이 머리는 곧장 경성제대 의학부로 옮겨져 부검에 들어갔다.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 기무라 서장은 사건 개요를 짤막하게 언급했다.
“아직도 혈색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서 범행은 금일 새벽에 있었다고 봅니다. 원한이나 치정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경성에서는 근래에 없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만전을 다하여 범인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범행 현장은 딴 곳인 것 같습니다. 아직 수사 중이므로 더 자세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동아일보’ 1933년 5월17일자)
범행은 대체 어디서 일어났을까? 피해자는 누구인가? 흉악한 범죄의 동기는 무엇인가?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다.
동요하는 민심
사건이 알려지자 경성은 일시에 술렁였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혹시 자기 아이가 희생되지나 않았을까 해서 놀러 나간 아이를 찾느라 미친 듯 골목을 누볐고, 나병환자, 걸인, 막벌이꾼들은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숨을 죽였다. 복덕방, 다방, 카페, 빨래터 가릴 것 없이 사람 모인 곳에는 온통 흉악무도한 사건 이야기였다.
“아마 문둥병자의 짓일 걸세. 머리는 갖다 버리고 골과 몸뚱이는 삶아 먹은 게야. 나는 꼭 그렇게 보이는 걸.”
“아니야 그렇다면 왜 골을 내어 먹나? 나는 등창병자가 그랬거나 아니면 간질쟁이 범행인 것으로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데 그래.”
“그도 그럴듯하지만 내 생각에는 모진 여자의 소행이라고 보이는 걸. 무슨 남편에게나 본처에게 원한을 가지고서 하늘이 노할 범행을 한 거야.”
“제 자식은 그리 못해. 어찌 산것의 목을 베냐 말이야.” (‘단두 유아 사건의 전모’, ‘신동아’ 1933년 7월호)
며칠 굶은 거지가 아이를 유괴해 병자에게 팔아먹은 것이다, 시체를 파다가 몸은 먹고 머리만 갖다 버린 것이다…. 시정에는 구구한 억측이 난무했다. 유례없는 흉악범죄를 접한 치안당국은 관할 서대문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경성시내 경찰을 총동원해 수사에 나섰다. 전화벨이 울리고, 오토바이가 내달리고, 수사대가 출동했다. 경찰서와 파출소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단서는 네 가지뿐. 아이 머리, 치마폭, 종이, 낡은 수건이었다. 당시는 DNA 검사가 개발되기 이전이었고 피해자의 몸통이 없어 지문을 감정할 수도 없었다. 그렇듯 열악한 조건에도 하루 만에 부검결과가 나왔다.
“성별 남아. 연령 만 1세 내외. 살아있는 아이의 목을 벤 것. 범행시간은 발견시각부터 10시간 이내.”
경성제대 법의학부 구니후사(國房) 교수는 송곳니가 났으니 만 1세 내외이고, 핏자국이 마른 정도로 보아 범행시간은 10시간 이내이며, 머리를 짧게 잘랐으니 사내아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담당형사는 머리를 싼 치마폭이 고급 제품임을 근거로 가난한 집 아이는 아니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사건 발생 다음 날에는 머리를 싼 종이가 쌀 봉투임을 밝혀내는 ‘개가’를 올렸다.
사건발생 하루 만에 경찰서 인원을 총동원하여 불면불휴로 활동하여 그 두부(頭部)를 싸서 버린 종이주머니의 출처를 알아낸 서대문경찰서에서는 그것을 유일한 단서로 삼아 가지고 한층 더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종이주머니의 출처는 알았으나 이것을 사용하는 집이 쌀집, 과자점, 가루집 등 무척 많으므로 종이를 사가지고 간 인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일일이 인상을 기억하기 어려워서 경찰이 수사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일보’ 1933년 5월18일자)
경찰은 마포 일대 쌀집과 과자점을 샅샅이 뒤진 끝에 범행에 사용된 쌀 봉투가 ‘최춘홍쌀집’에서 쓰는 봉투라는 사실까지 밝혀내고, 쌀집 고객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추궁했다. 그러나 별다른 혐의점은 찾지 못했다. 경찰은 ‘과학적 수사’를 통해 그밖에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뇌수를 파낸 흔적으로 보아, 범인은 나병, 매독, 간질, 등창병 따위의 치료에 쓸 뇌수를 얻을 목적으로 아이를 죽였다, 쌀 봉투에 묻은 흙과 사건현장의 흙이 다른 것으로 보아 아이는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유기됐다, 목과 뒤통수에 남은 칼날의 흔적으로 보아 범인은 칼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경찰의 수사망에 걸리지 않고 교묘하게 자취를 감추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매우 ‘영리한 자’다….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자랑하는 일본경찰도 부실한 단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은 미궁 에 빠져들었고, 경찰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커져갔다. 사건 발생 사흘째 되던 날, 기무라 서장은 동요하는 민심을 의식해 이렇게 말한다.
“아직 범인을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사건이 오리무중으로 들어간다고 꾸지람을 해도 하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수사방법은 있습니다. 하여튼 보십시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좋은 결과를 볼 겁니다. 언제쯤 잡히겠느냐고요? 그것은 아직 확언을 못하겠습니다.” (‘동아일보’ 1933년 5월18일자)
백주에 아이 머리가 나뒹군 지 한참이 지나도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의 보호자가 사건에 관련됐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라도 부모로서 제 자식의 목을 베었을 리는 없고, 아이의 보호자와 범인의 ‘음험한 거래’ 아래 범행이 자행됐을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이러한 추리대로라면 아이의 보호자는 친부모가 아니라 팔아먹을 목적으로 아이를 얻어와 기르는 사람일 개연성이 컸다. 이렇듯 어설픈 추리로 인해, 개구멍받이를 기르는 가난한 사람이 애꿎게 수사의 표적이 됐다.
아기무덤 수난시대
서대문경찰서 형사대는 사건 발생지를 중심으로 죽첨정, 중림동, 합동 일대에 흩어져 거의 모든 가정을 호구조사했다. 개구멍받이를 키우는 사람이 발견되면 마치 범인 취조하듯 조사했고,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점이 발견되면 가차없이 유치장에 가뒀다.
아이 머리 탓에 애매한 개구멍받이 보호자들이 수난을 겪은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실속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믿었던 호구조사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잔뜩 독이 오른 경찰은 난데없이 삽자루를 들고 나섰다.
18일(사건 발생 사흘째)부터는 최근에 죽은 어린아이를 매장한 공동묘지를 파보기 시작했다. 제일착으로 용산경찰서 공덕리주재소에서는 그 관내에서 최근에 죽어 매장된 아이가 셋이 있으므로 순사를 파견하여 아현리 467번지 이창호와 공덕리 252번지 최용석 두 명을 염리공동묘지로 데리고 가서 묘지관리인 송태식을 입회시키고 지난 16일(사건 당일)에 매장한 이씨의 딸 영애의 무덤과 15일에 매장한 최씨의 아들 동식의 무덤을 파보았다. 그러나 모두 다 머리가 확실히 붙어 있으므로 결국 헛물이었다.
또 한 명은 부모가 출타하고 없어 19일에 다시 데리고 가서 무덤을 파보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범죄의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가엾게 죽은 어린아이 무덤의 수난시대를 연출하고 있다. (‘조선일보’ 1933년 5월19일자)
경찰은 무덤이 아니더라도 의심 가는 곳이면 어디든 일단 파고 보았다. 한동안 경성시내에서는 ‘삽질’하는 경찰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런 삽질은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5월18일 오전, 서대문경찰서 수사대 최태준 순사는 봉래정 부근 언덕을 순찰하다가 파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애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진 경관들은 이것이 사라진 아이의 몸뚱이일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매장된 시체를 파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체에는 머리가 붙어 있었다. 한 살가량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시체였다. 단두 유아 사건과는 무관하지만 혹시 또 다른 살인사건이 아닐까 하여 부검해본 결과 병을 앓아 죽은 아이를 암매장한 것이었다.
아이 머리가 발견된 금화장 쓰레기 매립지 현장. ‘동아일보’ 1933년 5월17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이튿날 오후 용산경찰서는 언덕에 갓난아이를 암매장한 흔적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형사를 급파했다. 그러나 매장된 시체를 파보니 아이의 목뿐만 아니라 탯줄까지 붙어 있었다. 이렇듯 경찰의 총력전은 종종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을 연출해 세인의 조롱을 받았다.
어린애 목 자른 사건을 수사하는 중에 포복절도할 ‘난센스’ 한 막.
18일 오후 2시경 서대문서 형사들이 눈에 불을 켜 가지고 사건발생 현장인 금화장 뒷산 입구를 지키고 수상한 사람을 점검하고 있었다. 앞에는 노동자같이 보이는 사람이 뭉굴뭉굴하게 생긴 무슨 물건을 넣은 가마니를 등지고 가고, 뒤에는 물건임자 같아 보이는 사람이 따라가는 것을 형사가 발견하고 검문을 하고자 “게 섰거라”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가마니를 지고 가던 사람은 짐짝을 집어던지고 줄행랑. 옳다! 이것이야말로 나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던 어린아이 몸뚱이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형사들은 한달음에 달려가서 가마니를 들춰보았다. 이크! 가마니 속에 있는 물건은 틀림없이 시체는 시체이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이의 시체가 아니고 개 죽은 시체. 실망한 형사들은 어이가 없어 뒤통수를 치면서 발길을 돌렸다.
이 난데없는 개 시체인 즉 시외 왕십리 김삼갑이란 사람이 고기를 먹으려고 남의 집에서 기르는 개 한 마리를 몰래 때려 잡아가지고 짐꾼을 얻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러한 난센스 한 막을 연출한 것이라고 한다. (‘난데없는 개 시체’, ‘조선일보’ 1933년 5월19일자)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면서,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자랑하던 일본 경찰의 체면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사건 발생 나흘째, 노무라 형사과장은 다음과 같이 시인하기에 이른다.
“몇 가지 수사 방침은 이미 지시하여 실행해보았으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모두 실패한 셈이외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으니 어느 때에나 해결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소이다. 당분간 두고 볼밖에는 도리가 없겠고 또는 지금 생각하여 실행해 보려는 방침은 더욱이나 말할 수 없소이다.” (‘동아일보’ 1933년 5월20일자)
걸인 공황시대
5월20일, 사건 발생 닷새째. 때 이른 장맛비가 내렸다. 근 120여 시간 동안 경성시내 전 경찰은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영리한’ 범인은 좀처럼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경찰은 용의자 검거는커녕 누가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과학적 수사’를 한답시고 닷새동안 공연히 헛심만 쓴 셈이었다.
서슬이 시퍼렇던 경찰의 위세도 한풀 꺾였고, 자신했던 ‘과학적 수사’도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요행이라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온종일 장대비가 쏟아지자, 개천에서 어린애 몸뚱이가 떠내려오지 않을까 하여 경찰은 쏟아지는 비를 가르며 경성시내 개천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공연히 옷만 적실 뿐 소득이 없었다.
혹시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경찰은 누더기로 갈아입고 거지 소굴, 아편중독자 소굴로 뛰어들기도 했다.
소관 서대문서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서원 전부를 거지복장으로 또는 막벌이꾼으로 변장하여 가지고 지금까지 책상머리에서 과학적으로 세운 수사방침에서 일변하여 실지로 ‘모루히네(모르핀)’ 중독자처럼 혹은 막벌이꾼처럼 친히 그들의 소굴에 들어가서 이날 하루를 보내어 눈치코치며 오고 가는 말에서 새로운 단서를 구하고자 하였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동아일보’ 1933년 5월22일자)
5월22일, 사건 발생 일주일째.
수사는 지구전으로 들어갔다. 노무라 형사과장은 “자리를 걸고 일주일 내로 사건을 해결하라”며 일선 부하들을 압박했다. 도경찰부는 새로운 수사방침을 하달했다.
‘1. 집 잃은 젖먹이 아이 호구조사 2. 양육을 맡아 기르는 아이 발육상태 확인 3. 사생아나 기아를 기르는 집의 양육상황 4. 간질병, 문둥병, 정신병자의 행방추적 5. 토막민과 걸인 철저 조사.’
하층민과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었다. 도경찰부의 지시에 따라 경성시내 각 경찰서는 관내 걸인과 나병환자를 일제히 검거했다. 서대문경찰서는 나병환자 4명, 걸인 39명 해서 총 50여 명을 검거했다. 종로경찰서는 60여 명을 잡아들였고, 동대문경찰서는 90여 명을 검거하는 기염을 토했다. 돈 없어서 빌어먹는 것, 병들어서 아픈 것이 무슨 죄가 된다고, 걸인들과 나병환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유치장에 갇혔다. 한동안 시내 각 경찰서에는 이들이 내뿜는 악취가 진동했다.
경찰은 그간 받은 조롱과 수모에 대해 화풀이라도 하듯, 애꿎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걸인 대장(臺帳)’이니 ‘문둥병환자 대장’이니 하는 해괴한 서류를 만들었다. 바야흐로 ‘아기무덤 수난시대’는 가고 ‘룸펜 수난시대’ ‘걸인 공황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걸인을 잡아들여 단서가 잡히지 않으면 룸펜을 잡아들이고, 그래도 단서가 안 나오면 나병환자, 간질환자를 잡아들이고, 그래도 단서가 잡히지 않으면 과부, 서모, 계모까지 잡아들였다.
일반 민중은 경찰의 무력을 비난하는 편도 적지 않다. 서대문경찰서에서는 별의별 방법으로 수사에 힘써왔으나 그다지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게 되매 이제는 관내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어린아이를 낳았다가 죽어서 매장하였다는 집을 일일이 수사하여 당사자를 묻은 장소에 데리고 가서 반드시 파보게 하고 있다. 그리고 과부, 서모, 계모 등을 엄밀히 조사하여 매일 평균 오륙 명씩 데려다가 엄중한 취조를 계속하는 중이다. (‘조선일보’ 1933년 5월31일자)
경찰은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하층민을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방치했다.
사건 발생일인 16일 이후 서대문경찰서에서 붙들었다가 풀어준 사람이 백여 명에 달하는데, 경찰서의 말을 들으면 현재에도 삼십 여 명이 구금 중이라 한다. (‘동아일보’ 1933년 6월3일자)
일본 경찰은 ‘과학적 수사’에서 발휘하지 못한 ‘우수성’을 하층민과의 전면전에서는 한껏 뽐냈다. 제아무리 ‘영리한’ 범인이라도, 의심 가는 점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데야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하층민과의 전면전 이후 수사는 탄력을 받았고, 좀처럼 잡히지 않던 해결의 실마리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용의자 검거
6월1일, 사건 발생 17일째. 드디어 용의자가 검거됐다. 사건 자체가 엽기적인 만큼 용의자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용의자는 무당 가족 다섯 명과 ‘뻐꾸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하수인이었다. 사건발생 당시 핏자국을 쫓던 경찰견 한 마리가 프랑스대사관 근처 무당집 문전에 이르러 꼬리를 휘두르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
개는 그 집으로 뛰어들어 걸레를 물고 왔다. 경찰은 일찌감치 집 주인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수사했다. 하층민과 전면전을 벌인 이후 경찰은 무당 일가족과 하수인을 체포하여 유치장에 가두고 연일 심문해온 참이었다. 무당 가족은 “아니다” “모른다”로 일관했지만, ‘뻐꾸기’는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유력한 혐의자로 시내 죽첨정에서 대금업을 하다 죽은 박준화의 아들과 그의 전 가족 5명은 서대문서에 검거되어 엄밀한 취조를 받고 있다. 그들은, 박준화가 살아있을 때 등창이라는 매독성의 악질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여러 가지 약을 써도 도무지 듣지 않으므로, 세상이 전하는 미신에 의하여 그 근처 주점에서 고용살이를 하는 뻐꾸기를 시켜 아이를 사다가 살해케 하여 뇌와 몸을 삶아서 먹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범행 일체를 부인하고 있다. (‘동아일보’ 1933년 6월2일자)
경찰이 밝힌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고리대금업자 박준화는 4월22일 등창병으로 앓아 누웠다. 처음에는 팥알만한 종기가 오른편 등과 겨드랑이에서 났는데,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와 써봤지만 별반 차도가 없었다. 병세가 날로 악화되자 가족들은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을 누차 권했다. 그러나 박준화는 선친이 병원에 가서 사흘 만에 죽었으니 안 가겠다고 버티며 입원을 거부함은 물론, 양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종기는 점차 확대되어 나중에는 등 전체가 등창으로 덮였다. 그러자 무당 노릇 하는 아내 이씨는 어떻게든 남편을 낫게 해볼 작정으로 널리 약을 구하던 중 등창병에는 젖먹이 아기 골이 좋다는 말을 듣고 이것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무당 이씨는, 그 집에 출입하며 물도 길어다 주고 허드렛일도 해주던 일명 ‘샌전(청진동) 뻐꾸기’ 이성근을 시켜 널리 이 ‘약’을 구하게 했다. 술과 돈에는 사족을 못 쓰는 뻐꾸기는 각지로 돌면서 어린애를 구했다. 그는 결국 동대문 밖 안암리 가난한 집에서 자기가 기르겠다고 말하고 그 집 아이를 데려왔다. 뻐꾸기는 데려온 아이에게 천인공노할 범행을 저질렀다. 박준화는 뻐꾸기가 구해온 ‘약’을 먹었지만, 병세는 도리어 악화됐다. 박준화는 미신적인 방법으로는 소생할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최후의 희망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입원한 다음날 죽었다.
무당집을 수색하니 ‘물적 증거’가 쏟아졌다. 어른들만 사는 집에서 어린애 누비저고리 두 벌, 어린애 치마 한 벌, 어린애 버선 두 켤레가 나왔다. 그리고 피 묻은 무당의 치마 한 벌과, 쇠간인지 말간인지 사람간인지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동물 간이 들어있는 약탕이 발견됐다. 이처럼 유력한 물적 증거를 들이대도 무당 가족들은 범행을 자백하지 않았다.
무당 이씨는 어린애 옷가지는 어린애를 위하여 굿할 때 쓰는 것이고, 치마에 묻은 피는 생리 때 묻은 것이고, 간은 병문안 온 사람이 등창병에 좋다며 가져온 쇠간이라 했다. 사건을 전후해 무당 가족이 수상한 행동을 했다는 이웃의 증언도 있었다.
“사건이 발생되던 날 경찰견을 쫓아 형사대가 여러 번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경하기에 열중하였으나 그 집에서는 수양녀 경옥이가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눈으로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의심 나는 것은 사건이 발생되기 전날에 그 집 대문을 물로 깨끗이 닦아놓은 것입니다. 닦아놓을 필요가 있다면 사람이 보는 데서 해도 좋을 것인데 언제 닦았는지 동네 사람이 보지 못했다 하니 아마 깊은 밤에 닦은 것이라 보겠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피가 묻어서 그리한 것이라 하나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있습니까.” (‘동아일보’ 1933년 6월3일자)
무당 가족에게는 분명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무죄를 증명할 결정적 증거가 있었다. 박준화는 5월12일 오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이튿날 사망했다.
그 사실은 세브란스병원 진료기록과 사망진단서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머리가 발견된 것은 5월16일 오전 7시30분이고, 부검결과 사망시각은 빨라야 15일 밤 9시30분이었다. 아이의 골을 빼먹었다는 박준화가 아이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뻐꾸기는 사건 경위는 물론 아이의 몸뚱이를 묻은 곳까지 일러줬다. 그만큼 신빙성 있는 자백이었다.
‘동아일보’ 1933년 6월3일자. 사진은 단두 유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무당집과 ‘뻐꾸기’가 노숙하던 곳이다.
서대문경찰서 수사대는 뻐꾸기의 자백에 의하여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출동하여 금화산 일대를 오전 11시경부터 수사했으나 문제의 시체는 발견되지 아니하였다. 뻐꾸기의 자백에 의하면 확실히 금화산 부근에 묻었다 하나 시체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벌써 뻐꾸기가 버린 시체를 아직 체포되지 아니한 다른 공범자가 어디로 옮긴 것이나 아닌가 하여 수사방침을 돌려세우기로 되었다 한다. (‘동아일보’ 1933년 6월3일자)
대체 어찌 된 노릇일까?
이성근은 뻐꾸기 소리 흉내를 잘 내어 본명 대신 ‘뻐꾸기’란 별명으로 통했다. 청진동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샌전 뻐꾸기’라고도 불렸다. 그는 새문밖(서대문) 일대에서 술 잘 먹기로 유명하고, 술 먹으면 행패 부리기로 유명했다. 술만 먹으면 자리와 처지를 가리지 않고 뛰고 춤추고, 술을 준다면 어떤 일이라도 사양치 않는 주광(酒狂)이었다.
‘뻐꾸기’ 울음에 춤추는 경찰
‘주정뱅이 뻐꾸기’ ‘새문밖 피에로 뻐꾸기’로 통하는 그에게도 한때는 ‘골동취미가’ ‘젠틀맨’ 생활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새문밖 일본인 모 과자점에 뜨내기꾼으로 있을 때는 어디서 주워오는지 방안에다 옥거울 같은 골동품을 모아놓았으며, 연미복을 어디선가 얻어 입고 중절모를 쓰고 다닌 때도 있었다. 또 스님의 장삼을 구해서 입고 스님 흉내를 내고 돌아다니면서 동네 사람을 웃긴 적도 있었다.
괴인(怪人) 뻐꾸기의 변화 많은 상황은 결코 이뿐만 아니다.
그가 최근에 동네사람 물이나 길어주고 때로는 아이들 시체를 운반하는 극단적 천역을 할 뿐 아니라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막천석지(幕天席地)의 판에 박아놓은 무뢰한이지만, 일본인 모 과자점에 문객처럼 지내기 전에는 당당한 그 시절 ‘모던보이’로 머리는 ‘올백’으로 부치고 열손가락에 금반지를 끼고 새문밖 한량으로 이름을 날린 황금시대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색주가를 찾아 다니며 왼종일 이태백 노름을 하다가도 주머니 돈이 떨어질 때는 손가락에 꼈던 금반지를 서슴지 않고 뽑아 던져 새문밖 기사(騎士)의 호기를 보인 적도 한두 차례가 아니라고 한다. (‘괴인 뻐꾸기 전반생’, ‘조선일보’ 1933년 6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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